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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by 귀찬우 2023. 1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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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이란 무엇인가. 시인 이성복은 스승은 생사를 건네주는 사람이라고 했다. ‘죽음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기 위해 생사를 공부하는 사람이 스승이라고. ‘죽음의 강을 건널 때 겁먹고 급류에 휩쓸리지 않도록 이쪽으로 바지만 걷고 오라’고.

왜 케이스 바이 케이스에 진실이 있는지, 왜 인생은 파노라마가 아닌 한 커트인지, 왜 인간은 타인에 의해 바뀔 수 없는지, 그럼에도 우리는 파 뿌리 한 개에 우수수 매달려 함께 천국에 가는지, 자족은 무엇인지, 눈물은 언제 방울지고 상처는 어떻게 활이 되는지.

무엇보다 스승은 내게 죽음이 생의 한가운데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 싶어 했다. 정오의 분수 속에, 한낮의 정적 속에, 시끄러운 운동장과 텅 빈 교실 사이. 매미 떼의 울음이 끊긴 그 순간.

이어령 선생님의 말처럼 “죽음이 무엇인지 알게 되면 삶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가 이 인터뷰의 핵심이다.

위인들이 거창해 보여도 그렇지가 않아. 지면 또 한 번 부르짖을 뿐이지. 스스로 쓸 말이 없어서 남의 얘기나 옮겨봐. 그건 서생이지. 글짜 쓰는 사람. 글 쓰는 사람이 아닌 거야. 사람들은 글씨 쓰는 사람과 글 쓰는 사람을 혼동하는데, 글씨 쓰는 사람은 서경이네.

민주주의의 평등은 생각하고 말하는 자의 개별성을 인정하는 거라네. 그 사람만의 생각, 그 사람 만의 말은 그 사람만의 얼굴이고 지문이야. 용기를 내서 의문을 제기해야 하네. 간곡히 당부하네만, 그대에게 오는 모든 지식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키지 말게나

한 권의 책을 다 읽어도 모르는 거야. 책 많이 읽고 쓴다고 크리에이티브가 나오는 것 같아? 아니야. 제 머리로 읽고 써야지. 일례로 번역은 창조지만 학술 논문은 창조가 아니거든.

논문의 정체는 발견이지. 이미 있는 것을 찾아낸 것, discover는 cover를 벗기는 거야. 재미난 것은 아메리카 대륙을 찾아낼 때까지 ‘발견’이라는 말조차 없었다는 거네. 디스커버는 포르투갈어에서 왔다. 그러면 독창적이라는 말은 어떨 것 같나? 독창적이라는 건 사실 뻥이라는 얘기야. 너 혼자의 얘기라는 거지. 개성, originality가 인정받은 것도 19세기 이후 낭만주의가 생기면서부터였네. 그전까지만 해도 오리지널리티는 나쁜 뜻이었어. 보편적인 것을 위반했거든.

“나는 이런 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제일 무서워. 빅 쾌스천이지. 문인에게 다짜고짜 ‘문학이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 사람은 문학을 못 하네. 그런 추상적인 큰 질문은 무모해. 철학자에게 ‘인생이란 무엇입니까?’ 아인슈타인에게 ‘과학이란 무엇입니까?’라고 물어보면 대답할 수 없어.”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 당시의 특성과 다향한 상상을 통해 내것으로 접목시킬 수 있기 때문에 더 효과적인 것 같다. 내 생각을 그대로 말하기보다 다양한 비유로 이야기하면 더 듣는이가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보다 자기 것을 만들도록 도와주는 느낌이 든다.

“엄마 있네”의 확신이 없으면 인생에 바람구멍이 뚫려버리죠. 가장 가까운 타자가 시야에서 사라져도 영영 떠난 게 아니라는 믿음, 그 믿음이 인생에서 얼마나 소중한지, 저는 압니다.

단어의 어원을 따지고 의미를 결합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말을 하는 것이 정말 멋있게 느껴지는 것 같다

“늙으면 한 방울 이상의 눈물을 흘릴 수 없다네. 노인은 점점 가벼워져서 많은 것을 담을 수 없어. 눈물도 한 방울이고, 분노도 성냥불 휙 긋듯 한 번이야. 그게 늙은이의 슬픔이고 늙은이의 분노야. 엉엉 소리 내 울고 피눈물을 흘리는 것도 행복이라네. 늙은이는 기막힌 비극 앞에서도 딱 눈물 한 방울이야.”

“자네는 나에게 ‘진리’를 원하고 ‘정수’를 원하지. 그러나 역사는 많이 알려진 것만 기억한다네. 진실보다 거짓이 생존할 때가 많아. 진실은 묻히고 덮이기 쉬워. 하이데거가 그랬지. 일상적 존재는 묻혀 있는 존재라고. 내가 여러 번 얘기하지 않았나. 덮어놓고 살지 말라고. 왜냐면 우리 모두 덮어놓고 살거든. 덮어놓은 것을 들추는 게 철학이고 진리고 예술이야. 그런데 지금 우리 시대가 가장 감쪽 같이 덮어놓고 있는 게 무엇일 것 같나?” “우리가 감족같이 덮어 둔 것. 그것은 죽음이라네. 모두가 죽네. 나도 자네도.”

“제가 인터뷰한 장의사는 ‘죽음을 감출수록 산 사람이 잘 죽는 데 방해만 될 뿐’이라고 하더군요. 숨이 빠져나가는 모습을 목격하거나 시신을 마주한 경험 없이 죽음을 제대로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다고요. 가족이 떠날 때는 그의 시신을 직접 씻고 돌봐야 슬픔을 이길 수 있다고도 했습니다.” “우리가 진짜 살고자 한다면 죽음을 다시 우리 곁으로 불러와야 한다네. 눈동자의 빛이 꺼지고, 입이 벌어지고, 썩고, 시체 냄새가 나고… 그게 죽음이야. 옛날엔 묘지도 집 가까이 있었어. 귀신이 어슬렁 거렸지. 역설적으로 죽음이 우리 일상 속에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 있었던 거야. 신기하지 않나? 죽음의 흔적을 없애면 생명의 감각도 희미해져.

불순종으로 ‘먹은’ 그 죄를 끝낸 이가 바로 예수야.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 제자들과 그 유명한 최후의 만찬을 하잖아. 내 몸이 빵이고, 내 피가 포도주니, 나를 먹으라고. 그게 죄의 종말이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먹으라는 말씀. 기독교에서는 떡과 포도주를 나눠 먹으며 영적인 공동체로 거듭나지. 먹는 것에서 시작해 먹는 것으로 끝나는 게 구약과 신약의 하이라이트야. 우리 삶도 그래. 사는 게 먹는 거지. ‘함께 먹는 공동체’는 끈끈해.”

“생각하는 자는 지속적으로 중력을 거슬러야 해. 가벼워지면서 떠올라야 하지. 떠오르면 시야가 넓어져.”

오랫동안 인터뷰어로 살아오면서 작게나마 깨달은 게 있다. 질문하는 한, 모든 사람은 배우고 성장하는 것이다. 질문은 자기 모순적이고 연약한 인간이 이 미스터리한 세계와 대면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이며, 내가 낯선 타자와 상호작용할 수 있는 유일한 도구였다.

나는 상대를 비방하려는 게 아니라 납득이 안 가면 질문을 하는 본능을 따라갔어. 그런데 질문을 받으면, 다들 자기를 무시하고 놀린다고 착각하는 거야. 질문 없는 사회에서 자라는 게 그렇게 무서운 거라네. 그런 문화 속에서 나는 사랑받지 못했네. 존경은 받았으나 사랑은 못 받았어.

“알아도 모른체하고 몰라도 아는 체하며 사는 게 습관이 된 사회는, 삐걱거리는 바퀴를 감당 못 해. 튕겨내고 말지. 나뿐이 아니네. 글을 쓰는 사람들, 한 치 더 깊게 생각하는 사람은 고통을 겪게 돼 있어. 요즘엔 더하지 않나? 생각이 자랄 틈을 안 주잖아. 인터넷에 물어보면 다 나와. 이름 몰라도 사진 찍어서 올리면 다 나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내 머리로 생각한다네.”

“맞아, 이게 사고의 기본이야. 아버지 도끼는 존재하지 않고 개념으로 살아 있는 거지. 잘 생각해봐, 우리가 개를 개라고 할 때도 개의 형태를 지칭하는 게 아니라 사실은 노루와의 차이를 얘기하는 거라네. 명명은 약속된 기호야. 전쟁 중에 종로가 폭격당해서 건물이 다 쓰러져 없어져도 우리는 그곳을 여전히 종로통이라고 불러, 그게 언어고 우리는 언어를 기반으로 생각하는 거야. 정리하자면 물질 그 자체가 언어가 아니라 차이의 의미가 언어란 말일세.”

이 세상은 자연계, 기호계, 법계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져 있다네. 이 세 가지는 전혀 다른 세계야. 이걸 이해해야 우리는 혼돈 없이 세계를 보고 분쟁 없이 대화할 수 있어.

그런데 독재자들이 그걸 몰라. 자기가 하늘도 움직이고 바다도 때리고 햇빛도 가릴 수 있다고 생각하지.

“뜬소문에 속지 않는 연습을 하게나. 있지도 않은 것으로 만들어진 풍문의 세계에 속지 말라고.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어 진실에 가까운 것을 찾으려고 노력해야 하네. 그게 싱킹맨이야. 어린아이처럼 세상을 보고 어린아이처럼 사고해야 하네. 어른들은 머리가 굳어서 ‘다 안다’고 생각하거든. ‘다 안다’고 착각하니 아이들에게 ‘쓸데없는 거 묻지 말라’고 단속을 해. 그런데 쓸데 없는 것과 쓸데 있는 것의 차이가 뭔가? 잡초와 잡초 아닌 것의 차이는 뭐냐고? 그건 누가 정하는 거야? 인간이 표준인 사회에는 세상 모든 것을 인간 잣대로 봐. 그런데 달나라에 가면 그거 다 소용없다.”

이 컵을 보게. 컵은 컵이고 나는 나지. 달라. 서로 타자야. 그런데 이 컵에 손잡이가 생겨봐. 관계가 생기잖아. 손잡이가 뭔가? 잡으라고 있는 거잖아. 손 내미는 거지. 그러면 손잡이는 컵의 것일까? 나의 것일까?

각 나라가 떨어져 있어도 어디서 혁명 나면, 비슷한 시기에 다른 데서도 일어나거든. 생명이든 문명이든 지구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은 약속이나 한 듯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고 있지.

내 말은… 환자든 죄인이든 격리하고 처벌을 내릴 때, 무조건 ‘전체를 위한 결정’이라는 일반론에서 시작하면 안 된다는 거야. 항상 개인의 관점을, 제도의 맹점을 함께 봐야 해. 그런 것들을 보완하기 위해서 재판도 법도 그물을 촘촘히 하고 정밀해지는 거지만, 특정 상황에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력이 있다고 가정해보라고

‘이상 없다’는 말이 잔인하게 들리네요. 나의 고통이 ‘이상 없음’으로 처리될 때, 타인의 안도 속에 더 큰 소외가 일어나는군요.

백만 명이 죽었다고 하면 그건 통계야. 백만 명이 죽어도 그건 다 한 사람의 사적 죽음이거든. 그걸 잊으면 안 돼. 이 세상에 백만 명이라는 건 없어. 국가에서, 사회에서 볼 때 백만 명인 거야. 서부전선도 독일 병사의 시각에서 보니까 ‘서부 전선’인 거잖나. 그게 인식론의 문제야. 철학자들이 말하는 타자성의 철학이 거기서 나오지. ‘타자를 나의 것으로 만들지 말고 그가 있는 그대로 있게 하라.’

타자의 절대성을 인정하는 게 사랑이고, 그 자리가 윤리의 출발점이라네. 타자를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기 위해 왜곡해선 안 돼. 일례로 우리는 내가 아플 때 남이 그걸 아는 줄 알아. ‘아프냐? 나도 아프다!’ 그런데 그 아픔은 자기 아픔을 거기다 투영한 것뿐이네.

그런 의미에서 기록자들, 작나가 예술가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야. 도덕자나 지식자가 아니라네. 감추고 싶은 인간의 욕망, 속마음을 광장으로 끌어내 노출시키는 사람들이지. 거울로 비춰주는 거야. 보통 사람은 비참한 자기 얼굴을 안 보려고 해. 흐린 거울이나 깨진 거울로 보지. 직면할 용기가 없으니까. 예술가만이 일그러진 자기 얼굴을 똑바로 봐.

인간이면 언어를 가졌고, 이름을 가졌고, 지문을 가졌어. 그게 바로 only one 이야. 무리 중의 ‘그놈이 그놈’이 아니라 유일한 한 놈이라는 거지. 그렇게 내가 유일한 존재가 되었을 때 비로소 남을 사랑하고 끌어안고 눈물도 흘릴 줄 아는 거야. 내가 없는데 어떻게 남을 끌어안겠나? 내가 없는데 어떻게 우리가 있어?

컵에 달렸으니 컵의 것이겠지만, 또 컵의 것만은 아니잖아. ‘나 잡아주세요’라는 신호거든. ‘손잡이 달린 인간으로 사느냐, 손잡이 없는 인간으로 사느냐.’ 그게 중요한 차이를 만들어. 그런데 또 한편 컵에 손잡이가 아니라 자기 이름이 쓰여 있다고 생각해봐. 갑작스럽게 내 것이 되잖아. 같은 사물인데도 달라지는 거야. 유일해지는 거지. 이런 생활 속의 생각이 시가 되고 에세이가 되고 소설이 되는 철학이 되는 거라네.

사람마다 ‘진선미’중에서 어떤 가치를 더 우선하는지, 또 사회마다 어떤 가치를 우선하는지 선별해보는 것도 흥미롭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군다나 최근에는 ‘자기다움의 윤리’로 진정성이라는 화두가 올라오면서, 가짜 아닌 진짜를 향한 욕구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착하지 않아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예쁘지 않아도 개성으로 긍정하며, 그 ‘다름의 값’을 치러야 한다면 기꺼이 타인의 미움까지도 감수하겠다는 용기 있는 사람들, ‘진짜 나’로 살기로 결심한 사람들, 참자기를 거부하는 거짓의 세계에서 빠져나온 스마트한 개인들이 사는 세상. 점차 이 세계는 그렇게 ‘진’의 세계를 중심으로 수만 가지 바코드의 선과 미를 재배열하며 나날이 팽창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 진짜 인간을 뺀 거야. 인간은 변덕스럽고 어디로 튈지 몰라. 보편성이 없어. 사실 모든 생물이 다 그래. 개구리가 어디로 튈지 모르는 것처럼. 그런데 생명 아닌 것은 안 그래. 0도에서 얼고 100도에서 끓지. 과학으로 일반화하려면 그 대상이 정물이어야 하는 거야. 생명이 없어야 하는 거지.

과학과 예술이 대립하는 이유는 분명해. 과학은 모든 것을 ‘비인간’으로 가정하고, 예술은 모든 것을 ‘인간’으로 상상하기 때문이라네.

애초 ‘라스트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나 또한 그가 이 땅에 남은 자들의 가슴을 적셔줄 잠언에 가까운 카운슬링의 언어를 들려주리라 기대했었다. 그러나 그는 항상 인터뷰어의 통제를 벗어낫고, 그 예측불허의 확장성으로 덮여 있던 이불을 들추고, 그 안의 낯선 세계를, 세계의 민낯을 현미경처럼 비췄다.

아무것도 계획하지 않았기에 모든 것을 들을 수 있는 인터뷰라니…내가 얼마만큼 알고 얼마만큼 모르느냐에 따라, 스승은 때로는 신이 나서 때로는 분이 나서 목청을 높였다. 호기심과 천진성은 그의 본성이자 나의 본성이기도 했다.

변화잖아. 하룻밤 사이에 돌연 풍경이 바뀌어버린 거야. 우리가 외국 갔을 때 왜 가슴이 뛰지? 비행기 타고 몇 시간 날아왔더니 다른 세상이 된 거야. 하루하루 똑같던 날들에서 갑자기 커튼콜 하듯 커튼이 내려왔다 싹 올라가니까 장면이 바뀌어버린 거야. 막이 내렸다 올라가는 건 일생 중에 그렇게 많지 않거든. 외국 여행을 한다든지, 수술했다 마취에서 깨어난다든지… 그런데 일상에서 유일하게 겪을 수 있는 게 간밤에 내린 눈이라네. 잠자는 사이 세상이 바뀐거지.

목적이 있으면 걷는 게 되고 목적이 없으면 춤이 되는 거라네. 걷는 것은 산문이고, 춤추는 것은 시지. 인생을 춤으로 보면 자족할 수 있어. 목적이 자기 안에 있거든, 일상이 수단이 아니고 일상이 목적이 되는 것, 그게 춤이라네. 그런 의미에서 글을 쓰고 사는 것이 바로 나에게는 춤이 된다네.

인생은 파노라마가 아니야. 한 커트의 프레임이야. 한 커트 한 커트 소중한 장면을 연결해보니 파노라마처럼 보이는 거지.

나는 소유로 럭셔리를 판단하지 않아. 가장 부유한 삶은 이야기가 있는 삶이라네. ‘스토리텔링을 얼마나 갖고 있느냐’가 그 사람의 럭셔리지.

interest라는 영어 단어는 관심, 재미라는 뜻도 있지만 이익, 이자라는 뜻도 있어. 우리가 이익을, 이자를 내려면 애초에 관심 있는 것. 흥미 있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해. interest가 출발이지. 그게 모든 일의 순서고 이치라네.

선생의 고백처럼 이미 다 알던 것이 몸으로 느껴지는 순간, 우리의 지각은 저 아래서부터 꿈틀댄다. 젊어서도 알았지만 늙어서야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 육체의 명료성과 지각의 명료성은 그렇게 가뭄에 비 내리듯 서로의 상호성으로 몸을 적셔 늦지 않게 우리를 지혜의 바다로 이끈다.

길 잃은 양은 자기 자신을 보았고 구름을 보았고 지평선을 보았네. 목자의 엉덩이만 쫓아다닌 게 아니라, 멀리 떨어져 목자를 바라본 거지. 그러다 길을 잃어버린 거야. 남의 뒤통수만 쫓아다니면서 길 잃지 않은 사람과 혼자 길을 찾다 헤매본 사람 중 누가 진짜 자기 인생을 살았다고 할 수 있겠나.

지금 내가 자네와 이 정도 대화를 하는 것도 내가 자판기가 아니기 때문이라네. 답이 정해져 있으면 대화해서 뭘 하겠나? 자네가 만약 내일 같은 질문을 한다면 내 대답은 달라져 있을지도 몰라. 그래서 오늘의 대화가 중요한 거야. 우리가 내일 이 대화를 나눴더라면 오늘 같지 않았을 걸세. 그래서 오늘이 제일 아름다워. 지금 여기. 나는 오늘도 내일도 절대로 변하지 않는 신념을 가지 사람을 신뢰하지 않아.

인생도 그렇다네. 세상을 생존하기 위해서 살면 고역이야. 의식주만을 위해서 노동하고 산다면 평생이 고된 인생이지만, 고생까지도 자기만의 무늬를 만든다고 생각하며 즐겁게 해내면, 가난해도 행복한 거라네.

이 시대는 핏방울도 땀방울도 아니고 눈물 한 방울이 필요하다네. 지금껏 살아보니 핏방울 땀방울은 너무 흔해. 서로 박터지게 싸우지. 피와 땀이 싸우면 피눈물밖에는 안 나와. 피와 땀을 붙여주는 게 눈물이야. 피와 땀이 하나로 어울려야 천 리를 달리는 한혈마가 나오는 거라네.

책이 페이스북을 못 이기고 철학이 블로그를 못 이기고 클래식 음악이 트로트를 못 이기는 시대…

기가 막힌 이야기라네. 노동은 하기 싫은데 억지로 하는 거야. 노동에서 벗어나는 걸 쉰다고 하지. 내 일이 나한테는 노는 거였어. 나는 워커홀릭이 아니라 재미에 빠진 인간이었다니까

세상은 복잡해 보여도 피, 언어, 돈 이 세 가지가 교환 기축을 이루며 돌아가고 있어. 돈이 없으면 시장이 성립이 안 되고, 피가 없으면 더 이상 어린아이가 생길 수 없고, 언어가 없으면 사상이나 정의, 선, 가치는 다룰 수 없겠지.

돈의 비극이 딴 게 아니야. 돈의 교환 가치가 언어의 교환가치, 피의 교환가치를 침입할 때 이 3대 평행선이 부딪혀 충돌할 때 비극이 생기는 거야.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노래를 가르치지 말고 ‘황금은 황금으로 보고, 돈은 돈으로 보고, 사람은 사람으로 보라’고 가르쳐야지. 우리나라 말처럼 좋은 게 없어. 돌고 돌아 돈이라고 하잖아. 엊그제 재벌 회장에게 충성을 바치던 돈이 그다음 날은 거지에게 갈 수도 있어. 돈에게는 주인이 없거든. 그날 들어간 주머니의 명령을 따를 뿐.

하지만 한국인은 정량적인 것과 정성적인 것, 원칙과 직관은 융합해버려. 그래서 조직도 오거나이즈가 잘 되는 시스템보다 비상시에 만드는 임시 조직이 더 잘 굴러가. 한국사람이 위기에 강하다고 하는데, 위기에 강한 게 아니라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 강한 거라네.

그런 사람이 바로 21세기의 리더고 인재라네. 어느 조직이든 이쪽과 저쪽의 사이를 좋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조직은 망하지 않아. 개발부와 영업부, 두 부서를 오가며 서로의 요구와 불만을 살살 풀어주며 다리 놓는 사람, 그 사람이 인재고 리더야… 리더라면 그런 ‘사잇꾼’이 되어야 하네

목자는 양의 앞도 뒤도 아닌, 양떼 한복판으로 들어가서 양을 지켜낸다네. 진정한 목자는 양가죽을 쓰고서라도 스스로 양이 되어 그들의 삶에 동참하는 거야. 리더지만 플레이어지. 한니발이 그랬잖아. 부하와 똑같은 밥 먹고 똑같은 잠자리에 들고 똑같이 싸웠지.

지금도 보면 눈물이 핑 도는 것은 죽음이나 슬픔이 아니라네. 그때 그 말을 못 한 거야. 그 생각을 하면 눈물이 흘러. 그래서 너희들도 아버지한테 ‘이 말은 꼭 해야지’ 싶은 게 있다면 빨리 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