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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우의 끄적끄적

고백록

by 귀찬우 2024. 2. 29.

   

    저는 '고백록’이라는 책을 고등학교 때 살짝 읽었고, 올해 고전 중심으로 책을 읽어보자는 결심을 했기에 이번에 제대로 정독을 해보았습니다. 이 책에서 첫 번째로 흥미로웠던 점은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라는 사실을 저자의 경험을 통해 다시 깨닫게 된 것입니다. ‘자라나면서 점차 저는 제가 어디에 있는지 알게 되었고 욕망을 채워줄 사람들에게 제 뜻을 밝히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제 안의 욕망을 밖에 있는 사람들은 잘 알아채지 못했고 그들은 제 영혼으로 들어오지도 못했습니다. 제가 손짓발직으로 욕망을 표시해 봤지만 그들은 저를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간혹 알아차린다 해도 제게 해롭다는 이유로 그 뜻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저는 마구 울고 떼를 쓰며 앙갚음을 했지요.’ 유아기 때 아이들은 자신의 원하는 욕망을 채우기 위해 울고 떼를 쓰며 앙갚음을 합니다. 어렸을 때의 저의 모습도 이 내용과 마찬가지었다고 들었습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어렸을 때부터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이용하려는 모습을 갖고 있기에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이 저자가 다른 사람들에게 털어 놓고 싶지 않은 이야기들도 분명히 있었을텐데 자신이 실제 경험했던 많은 일들을 솔직하게 기록하면서 이 책을 쓴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한 궁금증을 가지고 이 책을 읽어나갔습니다. 이 책을 통해 저자는 자신의 삶의 모든 순간들이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고백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수많은 죄를 짓고, 부끄러운 일들을 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구원해주시고, 살아갈 이유를 알게 해준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책을 보면서 '이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가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공식적으로 시인하면서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야할 삶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저의 삶의 부끄러운 모습도 드러내면서 간증하면서 하나님이 저의 삶 속에서 어떤 일을 해나가고 있는지를 지속적으로 주위 사람들에게, 많은 이들에게 전하며 살아가고 싶다고 다짐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인상깊었던 내용은 시간에 대한 깊은 통찰의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시간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저자는 이 책에서 시간과 기억에 대한 이야기를 서술해나갑니다. 이 내용에 대해서 궁금하다면 고백록 후반부의 내용을 읽어보시면 됩니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영원함이란 ‘끝없이 무한한 어떤 시간’이 아니라 ‘시간을 초월한’ 절대 불변의 것이다. 시간과 인간은 항상 변하고 흘러가는 것이지만 하나님으로 표현되는 영원이란 언제나 머물러 있는 현재이다. 그러므로 영원한 현재이신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모을 때만이 모든 존재는 참된 의미로 존재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분산된 마음을 통일시키고 변화의 시간을 벗어나 영원한 하나님께 도달하려는 근원적인 소망을 밝히고 있다.’ 그래서 이러한 내용을 읽으면서 성경의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라는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시간을 잘 분배하고 쪼개서 잘 활용해라라는 의미보다는 하나님이 원하는 때와 시간을 잘 캐치하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줄 아는 눈을 갖추라라는 의미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을 가장 힘쓰며, 하나님의 뜻을 항상 묻고, 그 뜻에 순종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 다시 한번 느낄 수 있는 대목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앞으로도 하나님과 더욱 친밀해지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가 되기 위해 더욱 고군분투하며 살아가겠습니다.

인상깊었던 내용들을 정리해봤습니다.

게으름이 휴식처럼 보일 수 있지만 영원한 안식처이신 하나님을 떠나서는 어떤 안식도 없습니다. 낭비가 넉넉한 인심으로 비칠 수 있지만 하나님만이 오직 아낌없이 풍성하게 나누어 줄 수 있습니다. 

부모의 눈물로 키운 자식은 결코 멸망하지 않습니다.

"예컨대 어떤 시가 있다고 하세. 그런데 그 시가 시인의 의도와 달리 독자가 새롭게 해석하여 독자의 고민과 딱 들어맞는 경우가 있지 않은가. 그건 결코 놀랄 일이 아니네. 인간의 영혼에는 우리가 알 수 없는 고차원의 본능이 있기 때문에 점치는 사람들 상황에 딱 맞는 답이 나올 수 있지"

유한한 목숨에 집착하면 목숨이 사라질 때 결국 비참해집니다. 저는 친구보다도 제 비참한 삶에 더 애착이 갔습니다. 삶이 괴롭고 슬프지만 죽는 것은 두렵다는 상반된 감정이 일어났습니다. 친구들 앗아간 죽음을 원수처럼 증오하고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밑에서 살아가는 피조물들은 절재적으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요 절대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당신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존재한다고 할 수 있지만 당신과 같은 존재가 아니므로 진정한 존재라 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존재는 주님과 같이 변치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시면서 만물을 새롭게 하십니다. 

그리고 타락하기 쉬운 것들도 선한 것임을 저는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만약 그것들이 최고선이거나 혹은 전혀 선이 아니라면 타락할 것이 없기 때문에 결코 타락하지 않겠지요. 타락한다는 것은 어떤 해를 끼치면서 선을 깍아 먹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존재가 타락한다는 것은 자기의 선을 점점 상실하는 것입니다. 만약 선을 모두 상실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존재하는 것은 모두 선한 것입니다. 

제가 그토록 고민해 왔던 악은 실체가 없습니다. 만약 악이 타락할 수 없는 실체라면 그것은 최고의 위대한 선을 말하는 것이요, 만약 악이 타락할 수 있는 실체라면 그 안에 선을 지니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래야만 선이 조금씩 깎이면서 타락한다는 말이 성립됩니다. 그러므로 악이란 실체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들을 선하게 지으셨고 하나님이 창조하지 않은 실체란 결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악하다는 것은 어떤 실체가 아니라 지고한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생명을 저버리고 왜곡된 의지만 좇아 밖으로 교만해진 것을 말합니다. 

만약 마음이 원하는 것, 즉 의지가 백 퍼센트 완전한 것이라면 굳이 마음에게 명령할 필요가 없지요. 의지하는 대로 이미 실현되었을테니까요. 그런데 우리는 원함과 원하지 않음이라는 불완전한 두의지를 안고 있으며 두 의지는 각기 다른 부족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둘 사이에 균열이 생길 때 우리는 마음의 병을 얻지요

건강한 감각을 가진 사람들은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자연스레 느낍니다. 그러나 감각을 통해 전달된 것을 판단하는 이성이 없다면 어떤 아름다움도 그 의미를 가질 수 없습니다. 온갖 피조물들이 겉으로는 똑같아 보여도 이성적 판단력을 갖춘 자에게는 깊이 반응하고 그저 단순히 바라보는 자에게는 침묵합니다. 즉, 감각을 통해 인지한 것들을 내면의 진리와 비교하고 판단할 수 있는 영혼을 가진 자들만이 그 세계의 참뜻을 알 수 있습니다. 

영혼은 육체보다 우월하기 때문에 육체가 부여할 수 없는 생명을 우리에게 불어넣어 줍니다. 영혼은 우리 육체의 생명이고 하나님은 그 영혼의 생명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생명의 생명이라고 할 수 있지요. 제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 저는 육체의 감각을 통해서가 아니라 제 마음속 깊은 영혼을 통해 고귀한 생명이신 당신께 올라갈 것입니다. 저는 그곳에서 나 자신을 만나고 기억합니다. 제 과거의 경험을 꺼내 보기도 하고 미래의 행동을 예상하기도 합니다. 만약 기억 속에 나에 대한 이미지들이 보관되어 있지 않다면 저는 아마 나에 대해 한마디도 말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드높은 산봉우리나 거대한 파도, 쏟아지는 폭포, 별들의 운행 같은 것들에 경탄하지만 정작 자신이 가진 기억의 힘에 대해서는 무관심합니다. 어떤 것을 직접 보지 않고도 우리가 그것을 느끼고 말할 수 있다는 사실에 조금도 놀라지 않지요. 하지만 인간의 이런 능력에 저는 경탄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런 것들을 제 기억 속에서 이미지로 보지 않았더라면 저는 한마디도 표현하지 못했을 겁니다. 

지식은 감각을 통해 기억 속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 실체로서 기억 속에 존재했습니다. 제가 어떤 지식을 배워서 알게 된 것은 제 마음이 그것을 판단하고 인정하고 동의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르면 바로 달려나올 수 있도록 제 마음속 어딘가에 위탁해 두었던 것입니다. 

지식은 제가 배우기 전부터 이미 존재했지만 제가 배우기 전에는 기억에 나타나지 않았지요. 지식은 기억 속 멀고 깊숙한 비밀의 동굴 같은 곳에 묻혀 있었습니다. 누군가 제게 그것을 가르쳐 주고 주의를 기울여 파내게 하지 않았다면 아마 영영 생각조차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배운다는 것은 상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이미지를 갖지 않고도 그 본질을 알게 된다는 것은 무질서하게 기억 속에 흩어져 있던 것들을 생각을 통해 다시 모은 결과입니다. 주의를 집중해 깊고 먼 기억 속의 것을 가까운 곳으로 질서정연하게 보관하는 것입니다. 

제 기억 속에는 여러 가지 감정들도 보관되어 있습니다. 그것들은 경험한 그대로가 아니라 기억한 대로 조금씩 변형을 거쳐 저장됩니다. 

교만은 인간을 유혹하는 세 번째 욕망입니다. 교만함은 사람들이 자신을 두려워하거나 흠모해 주길 바라는 등 쓸데없는 것에서 기쁨을 얻으려는 욕망입니다. 

흐르는 긴 시간 동안에는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여러 사건들이 생겼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지만, 영원 속에서는 아무것도 흐르지 않고 생겼다 사라지기를 반복하지만, 영원 속에서는 아무것도 흐르지 않고 생겼다 사라지는 일도 없고 전체가 모두 동시에 존재합니다. 시간과 영원은 질적으로 다릅니다. 

그런데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아서 지금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그것들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또 현재가 늘 현재로 존재하고 과거로 바뀌지 않는다면 그것은 변화가 일어나는 시간이 아니라 영원이라고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시간이 존재하려면 현재는 반드시 과거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또 현재는 어떻게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시간의 존재 이유는 존재하기를 그만두는 데 있습니다. 비존재를 향하고 있다는 의미에만 시간은 존재합니다. 

우리가 시간을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가장 작은 조각으로 나눌 수 있다면 우리는 어느 한 조각을 현재라고 부를 수 있겠지요. 이 경우 현재는 미래에서 과거로 너무나 빨리 지나가기 때문에 지속되는 틈, 즉 연장은 없지요. 만일 현재가 지속성을 지닌다면 그것은 눈감짤할 사이에 과거와 미래로 나뉘어집니다. 그러므로 현재라는 시간은 연장이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지나간 것들의 현재, 지금 존재하는 것들의 현재, 다가올 것들의 현재'라고 말해야 옳습니다. 시간의 이런 세 가지 면은 우리 영혼 안에 존재하며 다른 어떤 곳에서도 그것들을 찾을 수 없습니다. 과거를 생각하는 현재는 기억이며, 현재를 생각하는 현재는 직관이고, 미래를 생각하는 현재는 기대입니다. 

시간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지만 그것을 파악하는 것은 결국 인간의 마음입니다. 제가 시간을 잰다고 할 때 저는 어떤 일이 지나가면서 제 마음 속에 남긴 인상을 재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은 미래를 '기대'하고 현재를 '직관'하며 과거를 '기억'하는 세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기대와 과거에 대한 기억이 존재하며 현재의 직관은 계속됩니다. 그러므로 미래가 길다는 것은 우리의 기대가 긴 것이며 과거가 길다는 것은 과거에 대한 우리의 기억이 긴 것뿐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영원함이란 '끝없이 무한한 어떤 시간'이 아니라 '시간을 초월한' 절대 불변의 것이다. 시간과 인간은 항상 변하고 흘러가는 것이지만 하나님으로 표현되는 영원이란 언제나 머물러 있는 현재이다. 그러므로 영원한 현재이신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모을 때만이 모든 존재는 참된 의미로 존재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분산된 마음을 통일시키고 변화의 시간을 벗어나 영원한 하나님께 도달하려는 근원적인 소망을 밝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