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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우의 인생책 리스트

어떤 생각들은 나의 세계가 된다

by 귀찬우 2023. 1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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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세상의 시작은 과거 세계의 파괴다. 화살의 발사라는 새로운 사건은 당겨진 활시위라는 이전 사건의 종료다.

한편으로 자유는 현대인을 새로운 모험과 다양한 경험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새로운 스트레스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아주 많은 것이 결정되지 않은 채로 불확실하게 남아 있다는 것, 그래서 스스로 그 많은 것을 일일이 정신적 에너지를 쏟아 채워 넣어야 한다는 것.

너무 많은 자유가 심적인 부담으로 이어진다면, 그 부담을 제거하는 방법이 하나 있다.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다.

삶에는 기준이 필요하다. 그 기준을 외부에서 정해주지 않을 때, 스스로 기준을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은 유한한 정신을 가진 인간이 무한히 복잡한 세계를 마주할 때 보이는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다.

훈련소에서 불침법 업무 때문에 새벽에 강제로 기상하는 훈련병은 자유롭지 않다. 하지만 스스로 새벽 5시에 일어나겠다는 규칙을 세우고 강한 의지를 통해 그 규칙을 지키는 사람은 자유를 잃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유에 따라 그 일을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불확정적으로 펼쳐져 있는 무한한 자유가 인간에게 불안감을 심어주는 반면, 자유를 스스로 제한함으로써 얻는 역설적 자유는 안정감과 주체적인 삶으로 우리를 이끌어준다.

자신의 행위에 합리적인 이유를 부여하려는 것은 인간의 뿌리 깊은 욕망일 것이다. 우리가 어떤 행위를 선택한 근거로 자신의 성격을 자주 든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성격을 우리의 선택에 대한 합리적 이유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김재권은 자신의 논문 <이유들과 일인칭>에서 일인칭적인 이유와 삼인칭적인 원인을 구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똑같은 행동에 대해서도 이유와 원인은 각각 다른 관점에서 설명을 제시한다. 이유는 내 욕망과 지식을 바탕으로 나의 입장에서 내려진 결정의 측면을 강조한다. 반면 원인은 내가 그런 행동을 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든 조건을 강조한다.

카리스마의 쇠퇴는 지금 시대의 특징적인 현상이다. 우리 사회에서 존경심을 일깨우고 무언가를 압도하는 듯한 에너지를 내뿜는 사람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카리스마가 쇠퇴하는 현상을 보고 가장 흔히 하는 생각이 ‘인물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이전에는 그래도 멋진 사람들이 있어서 그들을 믿고 따르며 존경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그런 사람들을 찾아보기가 매우 어려워졌다. 카리스마의 쇠퇴는 인터넷과 SNS의 확산이라는 기술적 변화와 아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삶을 소설에 비유한다면, 우리가 겪는 일들은 곧 소설의 소재에 해당할 것이고,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그 경험을 통해 무엇을 느끼며 살아가는지는 곧 소설의 표현에 해당할 것이다.

“시간은 사건들이 일어나도록 품는 토양이다. 그 토양 안에 현재적인 이해가 기초하고 있다. 따라서 시간의 간극은 극복되어야 할 무언가가 아니다.”

모든 인간은 의미를 추구하며 살아간다. 의미는 객관적으로 부과되는 것이 아니다. 세상 어디에도 의미라는 것이 실체적으로 존재하지는 않는다. 의미는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것이고, 삶의 과정을 통해 점차적으로 형성해 나가는 것이다. 의미는 해석을 통해 생겨난다.

분석은 나눌분과 쪼갤 석을 합친 말이다. 논리적인 분석은 하나의 대상을 다른 대상으로부터 구별시키거나, 또는 대상은 여러 부분으로 나눈다.

모든 삶은 죽음을 향해 흐른다. 우리가 죽음에 대해 제대로 된 지식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은, 삶의 목적지가 무엇인지에 대해 알지 못한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삶이 어디로 향하는지, 삶의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이런 의미에서 삶의 여정은 본질적으로 불확실성에 둘러싸여 있다.

프롬은 현대의 사랑이 무엇보다 자본주의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고 주장했다. 만약 내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좋은 상대를 골라 짝을 이루는 데 성공한다면, 그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연애와 최선의 결혼을 하는 것이며, 최고의 사랑을 이뤄내는 것이다.

프롬은 이러한 자본주의적 소비의 패턴이 현대적인 사랑의 패턴과 너무나 비슷하다고 주장한다. 많은 사람은 우선 자신의 욕망을 충족해줄 사랑의 상대를 찾는다. 이 경우 사랑의 최대 목표는 내 기쁨의 실현이다.

그런데 이렇게 자의식을 포기함으로써 외로움을 해소하는 방식은 우리가 독립적이고 성숙한 인간이 되는 것을 가로막는다. 세상에는 책임져야 할 일들이 많다. 엄마와 분리되지 않은 갓난아기의 상태로 되돌아가 모든 책임을 면제 받으면 잠시 동안은 행복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럴수록 점점 더 난장판이 되고 나 역시 점점 더 건강하지 않은 무력한 상태로 쇠퇴한다.

공생적인 연합과 반대로, 성숙한 사랑은 자신의 온전함을 보존하는 조건 속에서 이뤄지는 연합니다. 그 안에서는 개인성이 유지된다. 사랑은 인간 안의 활동적인 힘이다. 그 힘은 자신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분리시키는 장벽을 부수고 다른 사람들과 연합을 이루도록 한다. 사랑은 고립과 분리의 느낌을 극복하도록 한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자기 자신으로서 존재할 수 있도록, 자신의 온전성을 지탱할 수 있도록 해준다. 사랑 안에서는 둘이 하나가 되지만 여전히 둘로 남아있는 역설이 발생한다.

“인자는 자신이 일어서고자 할 때 다른 사람을 일으키고, 자신이 도달하고자 할 때 다른 사람이 도달하게 해주는 사람이다”

많은 사람이 가족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재산, 꿈, 신념, 때로는 목숨까지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다. 가족은 수단이라기보다는 목적에 가깝다.

사람들의 일상적인 생각 속에서는 가족 혹은 가족적인 인간관계가 아주 큰 중요성을 갖는 반면, 고차원적이고 추상적인 토론의 영역에서는 이상하리만치 가족에 대한 중요성이 확 떨어진다.

유교의 중요한 긍정적인 측면 중 하나는 가족을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고자 하는 시도라는 것이다. 유교를 출발시킨 고대 중국의 사상가 공자는 누군가를 조건 없이 사랑하는 마음이야말로 인간이 온 생을 바쳐 추구해 나가야 할 가치라고 생각했다.

반면 ‘너’는 나와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 내가 없이 ‘너’는 결코 ‘너’가 될 수 없다. 물론 내 친구는 내가 있으나 없으나 상관없이 그대로 존재한다. 그런데 이때 그대로 존재하는 것은 객관적인 삼인칭 세계 속의 친구다. 나의 친구로서, 내가 아는 그 사람으로서, 내가 부르는 ‘너’로서의 친구는 오로지 나와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 내가 사라지면 ‘너’ 또한 사라진다.

우리는 매일 아주 다양한 ‘너’를 마주하면서 살아간다. 일인칭과 이인칭 사이의 마주침은 우리 경험을 이루는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어쩌면 그 마주침만이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유일한 이유일지도 모른다. ‘너’가 없는 세상에는 곧 나도 없다. 그런 세상에서 나는 숨이 붙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존재하는 게 아닐 것이다. ‘너’가 없는 세상은 무섭도록 외롭고 공허하고 무의미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예술작품을 만든다고 생각하지만 반대로 우리가 예술작품에 의해서 만들어지기도 하며, 우리는 우리가 아이들을 키운다고 생각하지만 한편으로 우리는 아이들에 의해 키워지기도 한다. 만약 우리가 예술작품이나 아이들을 순순하게 객관적인 대상으로만 생각한다면 당연히 우리가 예술작품을 만들고 우리가 아이들을 키우는 것이 맞다. 하지만 그것들은 ‘너’로서 우리의 맞은편에 서서 말을 걸어오고 영향을 되돌려준다.

지금 이 시대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다극화다. 사람들은 갈수록 다양한 공동체 속하고 다양한 정체성을 가지는 추세다. 그곳에는 나름의 질서가 있다. 시청자들은 그 질서에 애착을 느낀다. 그것이 싫은 시청자는 채팅창을 나간다. 그 방의 질서와 감성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남아서 공동체를 형성하고, 서로 소통하며 정체성을 강화한다. 인터넷 방송 이외에도 각종 커뮤니티들은 다극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마음에 드는 커뮤니티에 참여해서 그곳의 질서에 따르며 그곳의 감성을 익힌다.

물론 이전부터 다양한 목소리는 항상 있어 왔지만, 이제는 그 목소리들이 탄탄한 자신만의 세력을 구축하게 되었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서로 생각이 다르다는 사실만으로 대화가 꼭 어려워져야 하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대화의 본질은 서로 다른 생각을 나누는 데 있다. 만약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다면 대화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대화는 항상 다른 생각을 나누는 과정이다. 아무리 생각의 차이가 크다고 해도 그것 자체가 대화를 가로막지는 않는다. 서로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상대방의 말을 듣고, 서로의 말을 통해 느낀 점을 말하고, 혹시 서로의 말을 통해 더 나은 생각으로 나아갈 방법이 있는지를 고민한다면 얼마든지 매끄러운 대화가 이뤄질 수 있다. 생각의 차이는 대화의 장애물이 아니다.

“언어는 여러 길로 이루진 미로다. 한쪽으로 들어가 나가는 길을 알다가도, 다른 쪽으로 들어가 똑같은 자리로 가면 더는 나가는 길을 모른다.”

비트겐슈타인은 애초에 말의 진정한 의미와 올바른 사용 같은 건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언어란 사람들이 그것을 사용하면서 무수히 많은 새로운 의미들이 덧붙여지고 기존의 의미들이 사라지는 과정을 거듭하면서 발전하는 무언가라고 생각했다. 그 과정에서 하나의 개념은 기존에 생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발전할 수도 있고, 다른 개념과의 경계가 흐릿해질 수도 있고, 새로운 의미가 낡은 의미보다 더 강력해질 수도 있다. 마치 오래된 도시의 모습처럼 말이다.

인간의 경험에는 매우 독특한 특징이 있다. 바로 지금 내 안에 떠오른 경험이 나중에 내 안에 떠오른 경험 또는 과거에 내 안에 떠올랐던 경험과 똑같은 종류의 것인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것이다.

절대적인 개념의 언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악인을 사랑할 줄 안다.

따라서 우리는 ‘나는 그 감정을 느끼고 싶지 않은데 상대방이 너무 이상해서 어쩔 수 없이 느끼게 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증오의 원인은 나에게 있지 않고 상대방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또는 모든 사람이 때때로 증오를 느끼고 싶어 한다. 증오는 나를 더 좋은 사람인 것처럼 느끼도록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증오는 선과 악의 대립 구도를 부각시킨다. 그리고 상대방을 악의 영역에 속한 것으로, 나를 선의 영역에 속한 것으로 보이게 한다.

“여전히 공감을 감정 전염이나 동정 등 다른 현상들과 어떻게 구별 지어 정의해야 할지 명확한 합의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 공감이 항상 좋게만 여겨지는 것은 아니다. 과하게 공감에 빠지는 것은 때로 이성적인 판단과 멀어진다는 의미에서 나쁘게 여겨지기도 한다. 주어진 상황을 이성을 통해 이해하는 게 아니라 감정을 앞세워 이해하는 것은 냉철하고 객관적인 평가를 가로막을 때가 있기 때문이다.

블룸은 이렇게 공감이 우리의 주의력을 시공간적으로 좁은 사례에 집중시키기 때문에 거시적인 도덕적 판단에는 오히려 방해가 될 때가 많다고 주장한다. 공감에 지배당하는 사람은 나의 결정이 지금의 주변상황을 넘어서서 더 많은 사람에게, 더 장기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칠지 공평하게 계산하는 능력을 잃어버린다.

심리학에서는 공감을 크게 감정적인 것과 인지적인 것으로 구별하곤 한다. 감정적 공감은 상대방이 느끼는 바를 나 또한 비슷하게 느끼는 것을 뜻한다. 반면 인지적 공감은 지적인 과정을 거쳐서 다른 사람이 무엇을 느끼고, 원하고, 생각하는 지 등을 이해하는 것을 뜻한다. 객관적인 의사 결정이나 문제 해결 상황에서는 감정적 공감보다 인지적 공감이 더 중요한 역할을 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감정적 공감에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감정적 공감은 인지적 공감이 가져다줄 수 없는 상대방에 대한 깊은 유대감과 인간적인 친밀함 등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독자적인 가치를 갖는다.

바로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세계가 진실의 전부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평소에 당연히 진실이라고 믿고 살아가던 이 세계가 사실은 누군가에 의해 꾸며진 세상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상상은 우리의 관심을 강하게 유발한다. 만약 지금 세계가 정말로 진실된 세계가 아니라면 평소에 가치 있다고 믿었던 것들이 사실은 진짜로 가치가 있는 게 아닐 수 있으며, 내가 이 세계의 규칙에 따라 세웠던 인생의 여러 계획이 모두 무의미한 것일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저마다 다양한 문화의 판 위에 올려지기도 하고, 교육제도라는 판 위에 놓이기도 한다. 각 문화와 교육제도는 주변 사람들이 따르는 길을 따라서 진리를 찾아 나가도록 우리를 이끈다. 그런데 만약 문화나 교육제도가 처음부터 잘못 설계되어 있어서 우리가 속고 있는 것이라면?

”어떤 아주 강력하고 교활한 존재가 그의 교묘한 능력을 이용해 나를 속이고 있는 것일 수 있다. 그런데 그런 경우라고 해도 어쨌든 내가 존재하는 건 확실하다. 그가 아무리 나를 속여도 내가 무언가로서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상 그는 나의 존재를 완전히 지워버릴 수는 없다. 따라서 이런 점들을 신중히 잘 고찰한 후 우리는 확정적인 결론을 내려야 한다. ‘나는 있으며,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는 내가 그것을 입으로 말하거나 정신적으로 생각하는 모든 순간에 필연적으로 참이라고 말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각 시대, 각 사회에는 멘토로 인정받는 사람들이 항상 있다. 그들은 어떤 목표와 가치관을 갖고 세상을 살아가야 할지, 어떻게 하면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지를 알려준다.

처음에는 소크라테스가 금방 찾을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지혜롭다고 소문이 자자한 정치가들, 시인들, 온갖 전문가를 찾아가서 대화를 해봐도, 그들 모두 치명적인 문제점이 있었다. 즉, 그들은 자신이 잘 모르는 사안에 대해서도 지혜를 가졌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자기 논리의 문제점을 들여다보고 인정하는 지적 겸손의 자세를 갖게 만듦으로써 독단적이고 꽉 막힌 견해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생산적인 성찰과 탐구를 시작할 수 있도록 만들어줬던 것이다.

스스로의 생각을 의심해보는 것은 제대로 된 지혜를 획득해 나가는 일의 시작점이다. 아마 누구든 평생을 노력해도 완전무결한 지식 같은 것에는 이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어제 가졌던 독단적인 생각에서 오늘 자유로워질 수 있다면, 그것으로 어제보다는 나은 지혜를 얻게 된 것이다. 어제까지 단 한 번도 의심해보지 않고 당연하게 받아들였었던 지식에 대해서 오늘 의심을 품어보고 그게 정말로 맞는지 따져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어제보다는 더욱 확실한 지식에 도달한 것이다.

내 생각이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이미 맞닿아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한 좋은 방법은 적극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다양한 견해를 알아보려 노력하는 것이다. 삶의 가치를 고민할 때, 순수하게 나 혼자만의 논리적 추론으로 답을 찾으려 하기보다는 다양한 견해를 조사하고 종합해보려 하는 것이 자신의 생각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이다.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을 죽음으로부터 면제시켜줄 수 없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대신 죽는 것’은 가능하다. 하지만 그것은 항상 ‘특정한 사안에 대해’ 남을 위해 희생하는 것일 뿐이다. 그렇게 누군가를 위해 죽는다고 해도 그 사람의 죽음은 눈곱만큼도 면제되지 않는다. 각 현존재는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 즉 죽음은 하나의 탁월한 존재 가능성을 의미하며, 그 가능성 안에서 본래적인 현존재의 존재가 단적으로 드러난다.

이렇듯 우리에게 우선적으로 경험되는 시간은 양적으로 균일하게 펼쳐진 시간이 아니라 의미를 갖고 나타나는 시간이다. 온통 하얗게 눈이 쌓인 벌판을 오랫동안 걸어가다 보면 공간감각을 상실한다고 한다. 모든 지점이 구별 없이 다 똑같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온 시간이 다 균일하게 똑같이 펼쳐져 있다면 우리는 결코 시간이 무엇인지 알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시간을 시간으로서 이해할 수 있는 이유는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 유의미하게 돌출되는 지점들이 있기 때문이다.

연극이 끝난 후 텅 빈 무대를 나 홀로 응시하는 경험은 어딘가 이상한 느낌을 전달해준다. 모두가 잠든 새벽, 나 홀로 고요한 거리를 걷는 것은 어쩐지 모르게 가슴을 간지럽힌다. 이런 정체 모를 감정이 생겨나는 원인은 이 경험들이 죽음의 순간과 유사한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경험들은 모두 텅 비어 있는 게 특징이다. 평소에 너무나 당연한 듯이 공간과 시간을 매우고 활발하게 움직이던 많은 사물과 사람이 이 경험들에서는 모두 침묵을 지킨다. 그러면서 텅 빈 공간과 시간이 돌연 나의 의식을 강타한다. 처음으로 나는 공간과 시간을 있는 그대로 또렷하게 의식하게 된다. 그럼으로써 그 시공간 속에 있는 나 자신을 마주하게 된다. 아무리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와 뒤섞여 살아간다고 해도 결국엔 혼자서 짊어져야 할 짐을 지닌 존재인 나 자신을 말이다.

즉, 위로는 주어진 상황을 적극적으로 바꾸는 게 아니다. 이미 주어진 상황은 어쩔 수 없다고 인정하는 상태에서 그래도 상황을 조금이라도 더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기운을 북돋아주거나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할 이유를 제시해주는 게 위로다. 이런 의미에서 위로는 물질보다도 우리의 정신과 우선적으로 관련이 있다. 객관적인 세계의 대상들을 바꾸는 게 위로가 아니라, 그 대상들을 바라보는 주관적인 정신을 바꾸는 게 위로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연 이런 감정의 역할이 바람직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감정은 신속한 의사결정을 도와주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에는 최선의 판단을 하지 못하도록 우리를 가로막는다. 하지만 감정에 부정적인 프레임을 씌우고 이성에만 선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감정이 가진 창조적이고 긍정적인 역할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만든다. 감정은 단순한 이성의 하수인이 아니다. 감정은 이성과는 또 다른 방식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는 그 자체로 고유한 통로다. 분명히 감정은 때때로 이성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감정의 도움 없이는 애초에 이해조차 할 수 없는 현상이 정말 많다.

감정의 역할이 중요한 점은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는다는 것이다. 감정은 기본적으로 말로 표현되지 않는다. 물론 우리는 말로 나타낼 수 있는 언어 표현들을 갖고 있다. 화남, 슬픔, 기쁨, 편안함, 안도감, 무서움 등 감정을 나타낼 수 있는 말들이 많다. 이런 아이디어에서 힐데브란트는 감정이 가치에 대한 언어적 추론을 뛰어넘는 이해에 이를 수 있는 통로라고 생각했다.

하물며 인공지능, 우주기술, 생명공학 등은 어떨까? 아마 지금까지보다 더 급속한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변화의 흐름에 적극적으로 반응하지 않는다. 사람을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힘은 거시적인 생각이 아니라 미시적인 욕망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서로 상충되는 내용들을 인접하게 제시한 것은 어느 정도 의도적이었다. 나는 진리로 이르기 위한 하나의 방향성을 제시하기보다는 다양한 사고의 가능성을 전달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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