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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우의 끄적끄적

내면의 아름다움을 찾아서

by 귀찬우 2023. 11. 1.

  우리는 왜 우리 자신을 사랑하지 못할까?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근거를 외적인 부분에서 많이 찾는 것 같다. 흔히 사람들은 이목구비가 뚜렷한 사람, 키 큰 사람, 몸의 비율이 좋은 사람 등과 같은 미적 기준을 가지고 자신과 타인의 외모를 판단하곤 한다. 그래서 자신 혹은 타인이 대중적인 미의 기준에 가까우면 이에 대해 우월하다고 느끼며, 자신 혹은 타인이 대중적인 미의 기준에 멀면 이에 대해 열등감을 느끼며 살아간다.

 

  대중적인 미는 드라마, 영화와 같은 미디어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 미디어에 나오는 예쁘고 멋진 배우들을 보면서 사람들은 그들을 대중적인 미의 기준으로 여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대중적인 미의 기준에 가까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 화장을 하고, 심지어 성형까지 하는 경우들도 많이 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내면을 가꾸기보다 보이는 겉모습을 더 치장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러한 사회적 흐름 속에서 외모를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며, 자신의 외모를 지나치게 신경 쓰는 외모지상주의 문화가 생겨난 것이다.

 

  나는 나의 과거의 모습에 대해 생각해본다. 나는 어렸을 때 키 작고 순수한 아이였다. 하지만 학교라는 사회는 나에게 넉넉하지 않았다. 외모지상주의의 지배를 받는 학교 속에 살고 있는 나는 외모에 대한 사람들의 판단과 비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나는 키가 작다는 이유 때문에 ‘짧은 다리, 난쟁이’로 불리며 친구들의 놀림을 받았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면서 나는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를 가지게 되었다. 그 당시 나는 ‘남자는 키가 커야한다’는 대중적인 미의 기준에 해당하지 않았고, 키 작은 나의 모습을 사랑하지 못했다. 나는 외모지상주의라는 사회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나의 과거의 행동에 대해 생각해본다. 초등학교 시절 또래 친구들은 못생겼다는 이유로 한 아이를 왕따 시켰다. 남들보다 외모적으로 매력적이지 않는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아이를 왕따를 시키는 것을 합리화하였고, 그 당시 몇몇 친구들은 폭력까지 사용하면서 그 아이를 괴롭혔다. 그 당시 그 아이의 마음은 어땠을까? 그 아이는 외모를 가지고 사람을 대하는 사회가 원망스러웠을 것이다. 그리고 외모가 아름답지 못한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했을 것이다. 또래 친구들은 그 아이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나도 그 아이를 직접적으로 따돌림하지 않았지만 그 아이에게 상처를 준 방관자 중 한명이었다. 나는 그 때 왜 그랬을까? 또래 친구들과의 관계가 멀어질까봐 그 아이를 도와줄 수 있는 용기가 없었을까? 아니면 어쩌면 나도 외모지상주의로 사람을 판단하며 그 아이가 따돌림 당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을까?

나는 과거의 나를 되돌아보면서 나의 모순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나는 그 당시 외모를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키 작은 내 모습을 보며 나를 사랑하지 못했고, 한 아이가 외모 때문에 왕따를 당하는 상황 속에서도 방관만 하고 있었다. 나는 왜 이렇게 모순적일까? 지금의 나는 아직도 모순적이다. 나는 이 사회가 외모를 가지고 사람을 차별하는 것에 대해 매우 안타깝고, 옳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다. 왜냐하면 사람의 겉모습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내면 자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지금도 내가 사람을 만나고 대화할 때 그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으려 해도 외모를 보고 판단하고 있는 나의 모순된 모습을 보게 된다. 이러한 나의 모순적인 부분을 볼 때마다 나는 좌절하곤 한다. 왜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살고 있을까? 이러한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없을까?

 

  이에 대한 해답은 내가 읽었던 책 ‘외모지상주의에 관한 소고 : 다큐멘터리 (테드창)’에서 알려주고 있다. 그 방법은 눈에 인위적으로 실미증을 유발하는 ‘칼리’라고 하는 테크놀로지를 사용하는 것이다. 이 기술을 사용하면 기술을 사용한 당사자가 모든 사람들의 얼굴의 형태를 정확하게 인식할 수는 있지만 이에 대해 어떠한 심미적인 반응을 경험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니까 대중적인 미에 가까운 사람이라고 해서 좋은 감정을 느끼지도, 대중적인 미에 먼 사람이라고 해서 불쾌한 감정을 느끼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기술을 활용하면 사람들을 외모로 판단했던 나의 모순된 모습을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며, 사람의 겉모습이 아닌 내면을 보는 데 집중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이 기술에 한계점을 언급하고 있다. 그 한계점은 칼리를 사용한다고 해도 그 활용 범위가 외모적인 요소 중 얼굴에만 해당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처음 사람들의 첫 인상을 판단할 때를 생각해보면 그 사람의 얼굴도 보지만 목소리, 키, 몸의 비율 등 다른 요소들도 고려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얼굴의 심미적 요소를 억제하는 기술인 ‘칼리’는 다른 외모적인 요소들까지 고려하지 못한다. 따라서 이 기술을 활용하는 것이 외모지상주의를 억제할 수는 있어도 외모지상주의를 해결할 수는 없어 보인다.

 

  나는 이제 결론을 내려 보려고 한다. 외모지상주의의 본질은 인간의 본능과 관련이 있다. 우리는 아름다운 자연이나 아름다운 작품들을 보면서 감탄하고, 행복감을 느낀다. 우리가 사람의 외모를 볼 때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우리 눈에 외모적으로 아름답게 보이면 그 사람에게 좋은 감정을 느낀다. 따라서 이 본능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 외모를 가지고 판단하는 외모지상주의는 절대로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것인가? 외모지상주의가 완전히 해결되지는 않더라도 우리 자신부터 사회를 망가뜨리고 있는 외모지상주의를 억제하려고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기 위해서 우리는 사람들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연습을 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하고, 소통을 하면서 그 사람의 본 모습을 알아가려고 노력해야한다. 물론 우리 기술이 많이 발전이 되어서 ‘칼리’라는 기술을 사용할 수 있다면 다른 사람들의 내면을 보는 데 더 도움이 될 것이다. 그 기술은 더 우리를 외모보다 그 사람의 내면의 모습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아직도 당신은 당신 자신을 사랑하는 근거를 외적인 요소에서 찾고 있는가? 이제 당신도 깨달았을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근거는 우리의 내면의 아름다움에서 온다. 나는 오늘도 내면의 아름다움을 보는 연습을 한다. 당신도 지금부터 내면의 아름다움을 보는 연습을 시작해보는 것이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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